육류의 근육 사이사이에 덩어리처럼 약간 붙어 있는 지방이나 피부 바로 아래에 층을 이룬 피하지방을 작게 잘라서 팬에 올리고 물을 약간 더한 후 물이 모두 증발할 때까지 약불로 익히며 지방이 녹아서 추출되는데, 이를 렌더링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액체로 바뀐 고형 지방은 요리용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다. 오리 구이를 할 때 여분의 지방을 잘라 렌더링으로 기름을 만든 다음 걸러서 유리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면 최대 6개월까지 두고 쓸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오리기름은 치킨 콩피를 만들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육류에 포함된 지방은 맛을 좋게 만드는 역할도 하지만, 고기가 바삭한 식감이 되지 않도록 막는 역할도 한다. 즉 렌더링은 요리용 매개체로 쓸 지방을 얻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지만 음식의 질감을 바꾸는 중요한 기술이기도 하다. 지방을 추출할 때 너무 높은 온도에서 익히면 겉은 타고 속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베이컨을 구울 때 기름이 먼저 나오고 전체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지방에서 기름이 추출되도록 열을 천천히 가하는 것이 렌더링의 핵심이다. 동물성 지방은 약 섭씨 175도씨에서 타기 시작하므로 베이컨을 구울 때는 오븐을 해당 온도로 맞춘 뒤 유산지 위에 올려서 굽는 것이 좋다. 오븐은 가스레인지보다 열이 더 천천히 올라가므로 그동안 베이컨의 지방이 추출된다. 베이컨이나 판체타를 가스레인지에서 익힐 경우에는 프라이팬에 물을 약간 넣고 익히면 온도가 조절되므로 고기가 갈색으로 변하기 전에 지방이 추출되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구운 닭이나 칠면조의 껍질은 지방이 추출될 정도로 충분히 가열한 경우에만 바삭바삭해진다. 오리는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저장하고 겨울철 낮은 기온에도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피하지방이 더 두껍게 형성된다. 따라서 오리의 껍질을 바삭하게 익히려면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날카로운 바늘이나 금속으로 된 꼬챙이를 이용해 전체적으로 표면에 구멍을 내는데, 특히 가슴과 허벅지처럼 지방이 가장 두툼하게 형성된 곳을 집중 공략하자. 이렇게 구멍을 뚫어 익히면 추출된 지방이 녹으면서 이 구멍으로 흘러나와 피부 전체를 덮게 되므로 껍질이 매끈하고 바삭해진다. 또 익히기 전에 날카로운 칼로 양쪽 방향으로 사선을 그어 작은 다이아몬드 무늬가 생기도록 칼집을 내면 같은 원리로 렌더링이 진행되어 가슴 부위에 완벽하게 바삭한 껍질이 생긴다. 나는 돼지갈비나 소갈비에 붙어 있는 지방을 좀 더 세심하게 조리하는 편이다. 잘 익힌 스테이크에 거의 익지 않은 물렁한 기름이 길게 붙어 나오는 것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비나 스테이크를 프라이팬이나 그릴에서 굽기 시작할 때 또는 굽는 과정을 마무리할 때는 고기를 세워서 그 기름 부분에 열을 가해 지방을 녹인다. 이를 위해서는 요리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집게로 고기를 세워서 잡거나 나무 스푼을 조심스럽게 받쳐 놓거나 프라이팬 가장자리에 기대어 두고 기름만 깔끔하게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 이 단계를 절대 빼먹지 말아야 한다. 기름 부분이 노릇하고 바삭한 별미로 변하면 그렇게 공들인 시간이 절대 후회스럽지 않을 것이다.
지방의 발연점이란 지방이 분해되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유독한 기체로 바뀌는 온도를 의미한다.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채소를 볶다가 갑자기 전화를 받느라 그대로 둔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다시 불 앞으로 돌아왔을 때 가스레인지 주변이 자욱한 연기와 함께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다면 기름이 발연점 이상 가열된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인턴 요리사에게 프라이팬 예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시범을 보이던 중 동료 요리사가 갑자기 급한 일이라며 나를 불렀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팬이 너무 심하게 가열된 나머지 올리브유를 붓자마자 발연점을 넘어 팬을 온통 시커멓게 타고 연기가 심하게 나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 댔다. 나는 체면을 지켜보겠다고 이건 일부러 한 실수이며 팬이 발연점 이상 가열되었을 때 기름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려던 것이라고 애써 변명했지만, 다른 요리사들이 다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민망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결국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들 한바탕 크게 웃어 댔다.
발연점이 높은 지방일수록 재료를 넣고 가열하면서 익혀도 맛을 해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포도씨, 카놀라, 땅콩에서 얻은 순수 정제 오일은 발연점이 약 섭씨 205도씨 이므로 딥 프라이나 볶음 요리 등 고온에서 조리하는 음식에 적합하다. 순수 지방이 아닌 경우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한다. 여과되지 않은 올리브유에 포함된 침전물이나 버터의 유고형분은 약 섭씨 175도씨부터 타리 시작하므로 저온에서 기름에 졸이는 요리나 간단한 채소 볶음, 생선이나 육류를 프라이팬에 구울 때와 같이 아주 높은 온도까지 가열하지 않아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에 사용하자. 또는 마요네즈, 비네그레트 드레싱처럼 열을 전혀 가하지 않고 만드는 음식에 사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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